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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악기장 고수환 명인은 가야금 만드는 일에 한평생을 바쳐온 사람이다. 그는 가야금의 12줄 소리에 매료돼 가야금 제작의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 40년이 넘게 가야금 줄을 다듬어 온 그는 이제 소리만 들어도 제대로 만들어진 악기인지 나쁜 악기인지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의 세월이 결코 짧은 것은 아니지만 70, 80 평생 한길을 걸어 온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길지만은 않은 이 기간 동안 고수환 명인은 끊임없이 제대로 된 가야금 찾기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가야금 한대 만드는데 소요되는 기간은 어림잡아 한 달이다. 잘해야 한달에 10여개 정도의 가야금을 만들지만 연주용으로 맘에 꼬옥 드는 것은 3개 정도라고 말하는 고 명인은 전북도립국악원이 추진 중인 악기 개량작업도 맡아 연구에 골몰하고 있다. 12줄을 15줄, 17줄, 22줄로 늘려 음폭을 확대시키는 일이다.
전북의 정읍과 전주는 예부터 한국악기 제작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예맥은 현악기 제작의 거두 김붕기 선생 등을 이어 태인 출신 고수환 명인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고수환 명인의 주요 경력은 1979년 전국관광민예품 경진대회 특선, 전북산업디자인전 특선에 이어 1980년 전북산업디자인전 우수상, 1984년 전북공예품경진대회 우수상, 1991년 전북공예품경진대회 은상, 전국공예품경진대회 입선, 스페인 트레드클럽 세계악기품평회 골드 트로피를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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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목장 김재중 명인은 전통창호 제작에 50년 넘게 종사하며, 창호 기법의 전수 및 보존에 기여하고 있고 궁궐, 사찰, 서원 등 전통 건축물의 창호제작 및 원형보존을 위해서도 남다른 노력을 하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금산사 대적광전, 서린사, 고창 선운사, 고창 묘향성 각 사찰, 향교의 창호를 들 수 있다.
김재중 명인의 전통창호는 건축의 아름다운 자연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균형 잡힌 비례미와 화려한 장식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그는 창호제작에서 보이는 세밀한 처리과정으로 ‘줄 마무리’가 견실하고 시각적인 중후함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김 명인은 전통문화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과 전통 공예인으로의 긍지가 남다르고 전통미를 전통기법으로 보존하려고 하는 신념이 강하다. 이에 김 명인은 2000년 11월 24일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9호 소목장(전통창호)으로 지정되었다.
김 명인은 작업을 하던 중에 손가락을 크게 다쳤다. 그래서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하나 잃었다. 그는 비록 네 손가락만으로 일을 하지만 다섯 손가락 가진 사람 못지않다. 그것은 수십 년간 갈고 닦은 실력 덕이다. 이제 그는 눈감고도 문을 제작할 만큼 실격이 쌓아졌다. 이 방면에서 그를 따라갈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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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천년의 숨결을 간직한 한지, 한지의 우수성과 실용성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지만 정작 좋은 질의 종이를 가능케 하는 한지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이 않다. 40년째 한지발을 만들어 온 유배근, 서정임 부부는 한국에서 한지발을 만드는 마지막 명인이다. 서울 인사동과 부산, 대구 등 전국의 한지공장에 발을 대주고 있는 유 명인은 아버지로부터 한지발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그에게 한지발 작업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시절, 든든한 가계였고, 4명의 자녀를 장성시킨 일등 공신이었다. 하지만 한지발은 세월의 변화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한지발의 모습이 꼭 늙어가는 우리네 모습과도 같네 그려”
유 명인은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짓지만 한지발의 미래를 생각하면 암담하기 그지없다고 한다. 특히나 한지발을 만드는 마지막 세대라는 불안함은 늘 이들 부부의 풀지 못한 숙제처럼 따라 다닌다. 한지발은 기계로 뚝딱뚝딱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섣불리 배운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발을 만드는 초(대나무살)를 만드는 것만 해도 대나무를 고르고, 표피를 긁어 얇게 뜬 대나무를 다시 물에 불려 눈금만큼의 크기로 짜갠 뒤 모나지 않게 칼로 훑는 등 하루는 족히 넘게 걸린다. 한지발을 엮는 작업은 이보다 더하다. A4 용지 크기만한 한지발은 하루를 꼬박 매달려야 하고 대발의 경우는 한두달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손을 놀리지 않으면 제 날짜에 물건을 넘기지 못한다.
유 명인의 바람은 이들이 일하는 전주시 동서학동 가파른 비탈길에 위치한 작업장에서 한지발을 만드는대나무 훑는 소리가 오래도록 흘러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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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식 명인은 30℃를 넘나드는 무더위 속에서도 하루 15시간 이상을 꼼짝없이 작업을 한다. 비록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더라도 눈매만은 총총히 빛난다. 작업을 하는 이의식 명인은 작품에 시선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손끝이 파르르 떨릴 만큼 꼼꼼히 옻칠을 한다. 작품에서 드디어 짙은 갈색으로 정제된 빛깔을 통해 묘한 광채가 나오면 그때서야 이 명인은 눈에 선 핏발을 푼다. 이 명인의 얼굴에 실려 있는 진지함은 구도행을 걷는 수도승의 모습과 닮아 있다. 이 명인은 옻칠을 벗 삼아 평생 옻칠공예를 해온 지금까지의 긴 세월 동안 이런 구도행을 걸어왔다.

1991년부터 약 5년간 전주대학교 산업미술과 시간강사로서 대학생들에게 평생 갈고 닦은 기술을 전승했으며, 1998년 11월에는 인천 카톨릭대학교 전통종교미술학과 겸임교수로 임명되기도 했다.
옻칠은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이다. 하나의 옻 칠기가 완성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소한 6개월 정도이다. 또한 옻칠은 먼지 하나, 티끌 하나라도 묻으면 다시 작업을 해야 할 정도라서 만다는 사람의 세심한 정성과 주의가 깃들여지지 않으면 작품이 탄생할 수 없다.
1993년 4월에는 전라북도 도지사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는가 하면 1996년 6월에는 대한민국 신지식인데 선정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전라북도 도지사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또 2006년에는 전라북도 자랑스런 전북인으로 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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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남원지방의 목가구들은 한국 전통 목가구 중에서도 재료선택과 짜임새, 금속장식 등이 뛰어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조석진 명인은 이른바 조선 목가구 가운데 전북지역의 명맥을 이어왔던 안은성, 조갑곤, 조석진으로 이어지는 전통공예의 원형을 간직한 인물로서뿐 아니라 세계기능올림픽과 명장대회의 수상실적으로 이미 전통공예계에 이름을 드러낸 명인이다. 조석진 명인은 1975년 우리나라 최초로 ‘스페인 국제기능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1988년 목재분야 명장 1호로 선정되었으며, 1998년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았다. 현재는 후학을 양성하며 작품 활동에 몰입하고 있다.

조석진 명인이 제작한 가구들은 무늬 결이 좋은 느티나무 판재를 좌우 대칭으로 배치하여 안정되어 보이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그가 즐겨 사용하는 목상감은 아자문(亞字文) 및 거머리(금속장식)를 목상감으로 문양을 파고 넣는 기법이다. 조 명인은 주로 삼층장, 농, 문갑, 흑단상감좌경대 등 전승가구를 제작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명품이란 좋은 나무(재목)를 만나면서 더욱 수려한 빛을 발한다. 나무 하나하나를 볼 때 색깔이라든지 결, 성질 등 재질을 제대로 알아야 쓰임새가 좋은 재목을 얻을 수 있다. 그러자면 다년간의 공력이 필요하다. 재목을 얻는 일은 마치 도박과 같다고도 한다. 재목이 좋지 않을 경우 작품 완성 후 1~2년쯤이면 소장품에 볼썽사나운 흠결이 드러나고 만다. 나무는 썩는 순간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조 명인이 재목의 그 같은 특성을 알기까지에는 숱한 시행착오와 적지 않은 세월이 소요되었음은 물론이다. 또 아무리 훌륭한 재목을 얻었다 해도 명인을 만나지 않으면 한낱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작품을 하나 완성시키자면 수천 번의 세심한 손길이 필요하고, 나무 하나하나마다 보석 다루듯이 온갖 정성을 다해야 한다. 장롱 하나를 완성하기까지는 보통 6개월여 가량의 시일이 필요할 만큼 많은 시간과 내공이 곁들여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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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 무형문화재 가운데 조충익 명인은 유일한 태극선 기능보유자다. 선자장 조충익 명인의 태극선은 다른 태극선들이 양쪽에 베를 입혀 이중감을 주고 있는데 반하여, 이중감을 주지 않으며 3가지 색깔이 어울리도록 하는 태극무늬를 사용하는 특징이 있다. 태극선은 다른 부채에 비해 공간의 면 분할 및 강한 색상대비 등이 두드러지며, 오랜 역사성과 그 전통에 맞게 우리 향토 민속공예로서 전승되고 있다.
조충익 명인은 접착력과 보존력이 좋은 풀을 스스로 개발하여 부채 모양이 뒤틀림이 없게 하며 모양 또한 다양하고 매우 섬세하여 이 분야에서 예술성이 뛰어나다.

일반부채 보다 살이 3배나 많은 250살짜리 세미선은 태극선 제조기법의 극치이다. 1970년대 후반에 처음 부채 제작을 시작해서 멋진 부채 만들기에 집념을 불태워온 그의 부채는 또 하나의 명품이라 할 수 있다. 조 명인의 작품은 90%가 관공서와 대기업의 홍보 판촉물로 납품되고 있다. 유일하게 전통을 고집하며 소재 또한 정통적인 것만 쓰기 때문이다. 지난 20여 년간 한국관광공사에 독점 납품을 비롯, 웬만한 국제적인 행사에 그의 태극선은 빠질 수 없는 필수품이 되었다. 태극문양과 어우러진 부채의 실용성과 예술성이 가장 한국적인 상품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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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는 왕산악에 의하여 7현금의 법제를 고쳐 만들고, 겸하여 곡을 지어 탔다는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대표적인 한국음악에 큰 역할과 음악사적으로 높이 평가되어지고 있다. 최동식 명장의 혼이 담긴 거문고는 질 좋은 오동나무로 공명통을 만들고 뒷단은 밤나무로 제작된다. 그의 제작법은 우리 선조들이 해오던 방법 그대로를 따르고 있다. 소리를 결정하는 70%는 재료라고 일컬어진다. 그러한 이유로 최 명장은 신품종 대신 재래종을 주재료로 쓴다. 무주, 진안, 장수 지역이나 임실 운암 골짜기에서 수집한 오동나무로 거문고는 만들어진다.

최동식 명장이 말하는 거문고는 예부터 학문을 닦는 선비들이 타는 것으로 악기 중에 으뜸으로 쳤다. 이러한 전통에서인지 몰라도 현재까지 거문고는 고고한 악기로 평가받고 있다. 가야금이 맑고 가벼운 소리인 반면 거문고는 낮고 굵은 소리가 난다. 술대를 쥐는 부분과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박이게 마련이지만 그 음색은 남성적인 매력을 한껏 자아낸다.
흔히 이르기를 악기장(전통음악에 쓰이는 악기를 만드는 기술 또는 그 같은 기능을 가진 사람)의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장식기능(솜씨) 뿐만 아니라 ‘음악과 음에 대한 깊은 안목과 이해’ 라고 한다. 악기란 보기에도 아름다워야 하려니와 그 소리 또한 아름다워야 하니, 필시 그것을 만드는 장인도 음과 음악에 대한 남다른 혜안이 곁들여져 있어야 함은 당연지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 명인의 대답은 의외였다.
소싯적 스승으로부터 호되게 견습한 기술과 기능을 배우고 또 익히기를 거듭하다 보니 자연 물리(物理)가 통하기 시작했고, 언제부터인가는 자신이 만든 악기의 소리(音)을 듣지 않고도 온전한 완성품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즉 ‘音(음)’을 통해 악기를 알기보다는 악기를 통해 ‘음’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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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천 최온순 명인은 1998년 11월 27일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 22호 침선장으로 지정되었다. 그 공적인 수의(壽衣)와 굴건제복(屈巾祭服)의 복원 재현이다. 최온순 명인은 한복기능사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하고, 단국대 부설 사회교육원에서 출토복식제작자격증을, 전통복식과정을 수료하면서는 자격인증서를 취득했다. 이후 최 명인은 풍남제전 전통복식초청전을 비롯하여 10회의 회원전을 가졌고, 기능 보유자 무형문화재 공개발표만도 7회나 참여했고, 한복의상 공모대전에서 금상을 수상한 외에도 4회의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최 명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기능교육 및 전문교육 강사를 역임하기도 하고, 전주동암종합복지관, 전주대문화관광학부, 기전여대 사회교육원에서 시간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 전라북도 장애인 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워으로 5차례나 위촉되었고 심사장만도 2회나 위촉되었다. 또 전라북도 지방기능경기대회 한복부 심사위원에도 4회, 심사장 2회의 위촉을 받은 바 있다.
최온순 명장의 대표작은 정경부인 은진 송씨 (영의정 정응두 부인) 당의 재현 (단국대 석주선 기념박물관에 소장), 덕온공주 (조선조 순조의 3녀) 당의 유물 녹원삼 재현 (단국대 석주선 기념박물관에 소장)을 비롯하여 회장저고리, 붉은치마, 사규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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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째 부채 만드는 가업을 잇고 계신 김동식 선생님은 부채인생만 50년을 훌쩍 넘긴 합죽선 명인이다. 김 명인의 섬세한 손놀림과 정교한 공정은 외증조로부터 140여 년 동안 이어져온 한국의 전통기술이다. 선생님께서는 전북공예대전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전에서 수상하시면서 탁월한 기술력을 인정받아 오시다가 2007년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제 10호 선자장으로 지정되었다.

김동식 명인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됨으로써 고종황제 당시 합죽선 제작기술자로 알려진 故 라학천 옹으로부터 이어진 합죽선 제작방식이 세월에 묻혀 사장되지 않고 계승될 길이 열렸다. 그가 원형대로 체득, 보존하고 있는 왕죽ㆍ한지ㆍ부레ㆍ아교풀 등의 사용과 크게 2부 6방으로 나누어진 합죽선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2부는 골선부와 수장부이며 6방은 합죽방ㆍ골선방ㆍ낙죽방ㆍ광방ㆍ도배방ㆍ사북방 등의 제작기술이 빛을 보게 되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그 세세한 과정을 100단계가 넘게 거쳐야만 하나의 부채가 제꼴을 갖추는 것이다.

투박하고 말없이 그의 손이 전통 합죽선의 자리를 계속 지켜줄 것이라 생각하니 붕대를 감은 김동식명인의 손이 더욱 듬직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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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에 생존해 있는 유일의 단청장 기능 보유자이신 신 명인은 한국의 단청과 함께한 평생은 집념과 인고의 시간이었다. 명인의 작업 경력은 단청의 오방색만큼이나 화려하다. 단청은 본래 고대사회에서 지배세력의 건축물이나 국가적 차원의 의식 종료 의례를 치르는 건물을 일반 건물과 구분하기 위해 시작됐다. 따라서 탑, 비석 등에 새겨진 문양도 단청의 모태라 할 수 있다. 건축물을 보호하여 건축의 수명을 연장하고 건축의 장엄을 의미하며 오행사상을 중심으로 길흉화복을 기원하는 상징적 의미가 크며 단청 문양 하나하나에 저마다의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단청분야에 전념을 다하신 신명인은 2007년 7월 20일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제 24호 단청장으로 지정 되었다.

경주 불국사 대웅전, 충남 해미읍성 일원, 서울 덕수궁 대한문, 전주 경기전 단청 등 전국의 유명한 사찰과 전통 목조 가옥에 신명인의 손길이 닿지 아니한 곳은 없다.

신 명인의 단청 사사 계보는 신언수 명인과 그 위의 중요무형문화재였던 김일섭(1975년 작고) 명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수 계보가 확실할 뿐 아니라 단청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단청 문양을 조채(彫彩)능력을 바탕으로 비례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 신 명인에 대한 세상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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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선 명인은 태극선으로 이름 높았던 방춘근 명인의 장녀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부채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내준 부채 숙제를 한 후에야 학교 숙제를 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부채 만드는 일에 있어서만은 그 누구보다 깐깐했던 아버지에게 칭찬을 들을 때면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그만큼 부채 만드는 일에 재능을 타고나기도 했다.

고 방춘근 명인은 시대의 변화, 부채의 흥망성쇠와 상관없이 그저 묵묵히 부채를 만들었다. 방춘근 명인에게 부채는 인생 그 자체였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부채를 만들기 시작해, 한국전쟁 통에도 손을 놓지 않던 부채였다.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던 부채였다. 어렵다고 부채 만드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오남매 중에서도 방화선 명인만이 부채 만드는 일을 놓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했다. 방춘근 명인에게 부채가 인생 그 자체였다면, 어렸을 적부터 고사리 손으로 부채를 만들어 온 방화선 명인에게도 부채는 삶의 거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를 돕겠다는 생각이나 책임감에 앞서 부채 없는 인생을 생각할 수 없었다.

이후 방화선 명인은 평생을 부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거의 모든 종류의 단선부채를 되짚어보며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 선면에 현대적 글씨나 그림도 넣어보고, 민화를 그려 넣어보기도 했다. 부채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새로운 일 배우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도, 대를 이어온 방화선 명인의 손길에서는 전통부채의 멋과 현대적 감각이 어우러지는 다양하고 새로운 부채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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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과 부호가 많았던 전주는 예부터 다른 지방보다 가구공예가 특별히 발달했다. 견고함은 물론이고 실용적이면서도 화려하고 기품있는 맞춤형의 그 작은 가구에 사람들은 ‘전주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최고의 대접을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전주장은 어느 날 갑자기 거짓말처럼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열네 살 때부터 목가구를 시작해 일찍이 ‘기술’ 하나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던 소병진 명인은 자칫 사라질 뻔 했던 전주장을 다시금 발굴하고 복원해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다. 인사동 골동품점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전주장은 온통 그를 사로잡았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전주장을 연구하기 시작한지 10여 년에 거쳐 소병진 명인은 버선장, 이층장, 머릿장 등 다양한 전주장을 복원했다. 2001년도부터는 전승공예대전에도 출품했다. 첫 해에는 장려상에 그쳤지만, 해가 바뀔 때마나 그 깊이를 인정받아, 2004년에는 결국 대통령상을 받았다.

소병진 명인은 새로운 꿈을 위해 여전히 청년처럼 뛰고 있다. 매일매일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후배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전주장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할 계획도 갖고 있다. 시대에 맞는 간결하고 편리한 전주장을 개발하여 더 이상 과거의 유물이 아닌 현대인들에게도 사랑받는 전주장을 만드는 것과 전주장 전문 박물관을 만들어 전주장을 계속 알리면서 누구든 전주장을 배울 수 있도록 공방을 마련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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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부채 역사 천년. 그 긴 시간동안 부채는 여름철 간단하게 바람을 일으키는 생활 속 도구에서 시작해서 예술품에 이르기까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 중에서도 합죽선은 고도의 기술과 장인정신을 필요로 하는 명품이자 예술품으로 사랑받아 왔다.

엄재수 명인은 2012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다. 하지만, 부채에 관해서 만큼은 그 누구 못지않게 오랜 세월 함께 해왔다. 그의 아버지는 근대부채 역사에 있어 결코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명인인 엄주원(작고) 명인. 어렸을 때부터, 재료를 구하러 다니는 일이며, 전시준비 등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부채 일을 배워왔다. 아버지가 그에게 가업을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언젠가는 이 일이 내 일이 될 것이라는 예감은 일찍부터 해왔다.

엄재수 명인은 현재 잃어버린 우리 합죽선을 복원해 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찬란하게 꽃피웠던 우리 합죽선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상당부분 그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엄재수 명인은 옛 선자장들의 유품 하나하나, 옛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부채에 관한 한구절한구절들을 보며, 옛 합죽선을 재현해 내려 애쓰고 있다. 대륜선, 칠부채, 백접선, 대모선, 우각선, 금반죽선 등 지금껏 그의 손을 거쳐 다시 세상에 빛을 본 합죽선의 종류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가 잃어버린 우리 부채를 재현해 내는 일에 몰두하는 까닭은 지금 세대에 해놓지 않으면, 결국 옛 합죽선들이 영원히 박물관이나 고문서 속에만 갇혀 버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 앞으로도 그는 합죽선 복원작업과 함께, 재현한 합죽선에 현대적 부채의 쓰임들을 접목해 내는 작업들을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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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산은 말 그대로 종이로 만든 우산을 말한다. 대살에 기름먹인 한지를 붙여 견고함과 고풍스러운 맛을 느낄 수 있는 우리 전통우산 중 하나다. 그러나 지우산은 불과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서민들이 사용하던 생활필수품에서, 현재는 그 존재 자체가 거의 희미해져버린 물건이 되었다. 대량생산되기 시작한 비닐우산이나 천우산에 그 자리를 내주면서부터다.

윤규상 명인은 자칫하면 옛 기록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지우산의 명맥을 오늘날까지 어렵게 이어오고 있다. 지우산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이어갈 수 없어 한 때는 뜨개바늘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그때도 지우산을 손에서 놓지는 못했다.

비닐우산이나 천우산에 밀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지우산을 찾지 않을 때에도, 윤규상 명인이 지우산을 손에서 놓지 못했던 까닭은, 꽃다운 나이 열일곱부터 거친 대나무에 수없이 손을 베고 찔려가며 익혔던 지우산이 누군가는 지켜내야 할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서가 녹아있는 물건이라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우리 전통지우산이 오래도록 전승되는 것이 희망인 윤규상 명인은 이를 위해 오늘도 전통 지우산의 현대적 활용과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윤규상 명인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11년에는 ‘우산장’으로 무형문화재에 선정되었다. 우산장으로는 전국적으로도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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