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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자장 방화선 2013-01-28 7685
 
방화선 명인은 태극선으로 이름 높았던 방춘근 명인의 장녀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부채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내준 부채 숙제를 한 후에야 학교 숙제를 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부채 만드는 일에 있어서만은 그 누구보다 깐깐했던 아버지에게 칭찬을 들을 때면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그만큼 부채 만드는 일에 재능을 타고나기도 했다.

고 방춘근 명인은 시대의 변화, 부채의 흥망성쇠와 상관없이 그저 묵묵히 부채를 만들었다. 방춘근 명인에게 부채는 인생 그 자체였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부채를 만들기 시작해, 한국전쟁 통에도 손을 놓지 않던 부채였다.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던 부채였다. 어렵다고 부채 만드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오남매 중에서도 방화선 명인만이 부채 만드는 일을 놓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했다. 방춘근 명인에게 부채가 인생 그 자체였다면, 어렸을 적부터 고사리 손으로 부채를 만들어 온 방화선 명인에게도 부채는 삶의 거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를 돕겠다는 생각이나 책임감에 앞서 부채 없는 인생을 생각할 수 없었다.

이후 방화선 명인은 평생을 부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거의 모든 종류의 단선부채를 되짚어보며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 선면에 현대적 글씨나 그림도 넣어보고, 민화를 그려 넣어보기도 했다. 부채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새로운 일 배우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도, 대를 이어온 방화선 명인의 손길에서는 전통부채의 멋과 현대적 감각이 어우러지는 다양하고 새로운 부채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부채에 녹아든 삶

방화선 명인에게 있어 부채는 삶 그 자체나 다름없다. 태극선으로 이름 높았던 방춘근 명인의 장녀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부채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내준 부채 숙제를 한 후에야 학교 숙제를 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부채 만드는 일에 있어서만은 그 누구보다 깐깐했던 아버지에게 칭찬을 들을 때면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그만큼 부채 만드는 일에 재능을 타고나기도 했다.

이후 방화선 명인은 평생을 부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거의 모든 종류의 단선부채를 되짚어보며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 선면에 현대적 글씨나 그림도 넣어보고, 민화를 그려 넣어보기도 했다. 부채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새로운 일 배우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도, 대를 이어온 방화선 명인의 손길에서는 전통부채의 멋과 현대적 감각이 어우러지는 다양하고 새로운 부채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우리부채
부채는 인위적인 힘을 가해 바람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들어진 도구를 말한다. 사람은 계절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해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여름의 무더위를 식히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종이 등을 가지고 바람을 일으켜 사용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간단한 원리를 이용한 도구가 바로 부채이다.

부채의 기원은 인류가 넓은 활엽수의 나뭇잎을 이용한데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아프리카 산간 지대의 원주민들의 생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뭇잎은 시간이 지나면 썩어 사용할 수 없게 되고, 이에 따라 좀 더 오래보관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새의 깃털을 이용한 부채나 가죽 혹은 비단을 이용한 부채가 사용되었다. 종이가 발명된 이후에는 그 편리함으로 인해 종이부채가 주류를 이루었다.

부채는 단선과 접선으로 나눌 수 있다. 단선은 원선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둥근 모양을 한 부채로서 ‘둥근부채’ 혹은 ‘방구부채’라고도 한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부채로 둥글던지, 네모든지 그 형태가 변하지 않고 펼쳐져 있는 부채를 단선이라고 부른다. 단선은 오랜 옛날 인간이 더위를 이기기 위해 면이 있는 것을 부쳐서 바람을 내었던 것에서 유래하며, 그 종류에는 주로 면의 모양에 따라 오엽선, 연화선, 연엽선, 파초선, 공작선, 태극선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부채의 순 우리말은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의 ‘부’자와 가는 대나무 또는 도구라는 뜻의 ‘채’자가 합해져 이루어진 말로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키는 채’라는 뜻이다. 부채는 한자어로는 ‘선(扇)’자로 표기되는데, 한자어 선(扇)은 ‘지게문 호(戶)’자에 ‘깃털 우(羽)'자가 합해진 글자다. 즉, 한자를 풀어보면 집안에 있는 날개라는 뜻이기도 하고, 날개로 엮은 문짝이란 뜻으로도 파악될 수 있다.

지게문은 옛 가옥에서, 흔히 돌쩌귀를 달아 여닫는 문으로 안팎을 두꺼운 종이로 싸서 바른 문이다. 이는 부채의 모양이 지게문의 모양과 흡사한데서 붙여진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고, 여기에 ‘깃털 우(羽)’자가 합쳐진 것은 새의 깃털을 이용해 부채를 만들었다는 데서 초기 부채의 형성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지게문 모양으로 깃털을 모아 만든 데서 ‘선(扇)’이라는 글자가 탄생했던 것이다.

집집마다 지게문이 없는 집은 없었던 것처럼 예전에는 부채 없는 집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사정이 달러졌다. 선풍기와 에어컨이 부채의 자리를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방화선 명인은 부채의 설자리가 좁아진 오늘 날까지 고집스레 부채를 만들어오고 있다. 오늘날 정작 필요한 것은 사람의 손으로 정성스레 만들어진 부채가 일으키는 ‘선한 바람’이라는 그의 고집스런 믿음 때문이다.


태극선 명인 가문에서 태어나 대를 잇다

방화선 명인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태극선) 기능보유자다. 대나무를 깎고, 살을 놓고, 한지를 오려 붙이기를 50년 가까이 해왔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옛날 전통 방식 그대로를 고수하며 부채를 만들고 있다.

방화선 명인은 단선을 만든다. 태극선을 비롯해 모든 단선 부채를 만들고, 유물을 복원해 옛 부채를 재현내기도 한다. 그가 만드는 단선부채는 대살을 깎아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한지를 붙여 만든 우리 고유의 부채로 예부터 서민들의 필수품이었다. 현재 전주에서도 단선부채를 만드는 장인들이 몇 있지만, 대를 이어 부채를 만드는 장인은 방화선 명인이 유일하다.

그에게 부채는 삶 그 자체였다. 2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부채를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 고 방춘근 명인 역시 전라북도 제1호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선자장으로, 방구부채 중에서도 특히 태극선의 명인으로 불렸다. 아버지 고 방춘근 명인은 자식들에게 매일 부채 만들기를 숙제로 내줬고, 부채 숙제가 끝나야만 학교 숙제를 할 만큼 엄격하게 부채를 가르쳤다. 때문에 방화선 명인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부채를 배웠다’고 할 만큼, 어렸을 때부터 부채를 시작해 오랜 세월을 부채와 함께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제일 좋아할 나이에 부채를 만들라는 아버지의 엄격함에 원망도 해보았지만, 방화선 명인은 어린 나이에도 살을 제법 잘 놓아, 그 엄하던 아버지에게 칭찬을 듣는 등 일찍부터 부채 만들기에 재능을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부채 만드는 공장이 놀이터였고 덕분에 다른 길은 생각해볼 수도 없었다. 부채가 세상에서 제일 자신 있는 일이자, 부채 없는 일상들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방화선 명인의 집은 그가 어렸을 적부터 늘 부채 만드는 일로 분주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전주는 일찍이 조선시대 궁궐 진상용 부채를 생산했던 선자청이 있던 고장이자 부채의 본산지다. 전주에서도 단선 잘 만들기로 소문난 고 방춘근 명인의 집에는 계절에 관계없이 부채를 만들어 달라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당시 방화선 명인의 집에 부채 만드는 일꾼만 16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이 밤낮없이 호롱불 아래서 작업을 해야 할 정도로 수요가 많았다. 집에는 늘 부채 만드는 사람들과 부채를 주문하러 온 사람들로 분주했고, 눈길 닿는 곳곳마다 부채가 가득 쌓여 있었다.

“아버지 부채공방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160여명 쯤 됐어요. 그때는 밤낮없이 일해도 부채를 대기 힘들만큼 수요도 많았고, 그만큼 집이 늘 분주했어요. 덕분에 우리 남매들도 부채를 만들어야 했어요. 학교 숙제로 아버지가 정해준 만큼의 부채를 만들고 나서야 겨우 할 수 있었죠. 친구들과 놀고도 싶었죠. 하지만 아버지가 워낙 엄하셨어요. 특히 부채 만드는 일에 있어서는 거의 완벽주의자셨어요. 일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고, 부채 만드는 과정이 아무리 복잡해도, 일일이 다 확인하시고 전통방식을 벗어나지 않으셨어요. 부챗살 위에 티끌 하나 앉아 있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죠.”

고 방춘근 명인의 엄격함은 자식들이라고 해서 비켜가지 않았다. 자식들에게도 부채 일 만큼은 혹독하게 가르쳤다. 그런 호랑이 같은 아버지가 살을 잘 놓는다며 칭찬해 주는 순간에는 밖에 나가 친구들과 놀고 싶어 좀이 쑤셔 죽을 것 같던 어린 방화선 명인도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 엄하던 아버지가 잘했다고 칭찬해 주시면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요. 그때 아버지의 칭찬 덕분에 지금까지 부채를 계속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나름 철이 들었다고 생각한 이후로는 부채가 싫다거나 지겹다거나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좁은 부채면에 백여 대가 넘는 얇은 부챗살을 채워야 하는 세미선도 어렵잖게 놓을 정도로 재능을 보이던 방화선 명인은 엄격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전통방식 그대로, 거의 모든 단선 부채를 충실하게 배울 수 있었다.


전주와 부채, 그리고 아버지의 기록

엄재수 명인이 당시 전주의 부채와 방춘근 명인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 놓은 자료가 있어 옮겨본다.

조선시대 관에 부채를 공급했던 곳이 선자청이다. 부채를 만드는 선자장들이 마지막까지 작업했던 곳이 경상감영과 전라감영 두 곳이다. 두 곳 중에서도 경상감영은 지역적 특성상 대나무는 풍부했으나, 한지 제작의 맥이 끊어지면서 자연히 부채를 만들 수 없게 되었고, 전라감영은 남원과 담양의 풍부한 대나무와 전주한지의 맥이 계속 이어지면서 조선 말기까지 선자청이 존재 할 수 있었다. 전라감영에 소속되어 있는 선자청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기록으로 정확하게 남겨져 있지 않다. 추측으로는 단오선을 공납하는 제도가 필요 없어진 일제 강점기 전후였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선자청에 근무하며 부채를 만들던 경공장이나 선자청에 납품을 하던 외공장의 장인들은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선자청을 벗어나 지금의 중앙동에 터를 잡게 된다. 당시 중앙동에는 부채를 도매로 전국에 공급하는 중간상인이었던 송지방을 비롯하여 삼화상화, 무궁화공예사 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전하는 60년대 이야기 중에는 중앙동 근처에 비단 장사와 사북(부채를 고정하는 금속제 고리)를 만드는 곳이 있었고, 오거리에도 사북을 만드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얼마나 많은 부채가 중앙동 근처에서 만들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중앙동 작업의 형태를 보면 일본인들이 자본을 대고, 장인들이 작업을 관리하면서 그 밑에 많은 일꾼들을 거느리고 있는 형태였다. 단선 쪽에는 한경필 선생과 그 제자인 방충근 선생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합죽선 쪽에는 문준하 선생 아버지와 문준하 선생이 많은 일꾼을 거느리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 자본이 사라지고 중앙동이 발전하면서 부채장인들은 인후동의 가재미와 안골, 아중리의 석수리로 터을 옮겨 새로운 자본가를 중심으로 공방들을 형성하게 된다. 특히 가재미골은 그때부터 부채골로 형성이 되는데, 당대의 부채 명인인 방충근 선생과 이기동 선생, 엄주원 선생이 가재미에서 모두 터를 잡고 살았다.

방춘근 선생은 “일제시대 때 한 집에 사는 김희명이라는 사람이 부채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산업조합을 다녔는데 참 좋아보였어. 그 후 해방이 되고 그것이 전망이 있어 보인다 싶어 산업조합에 들어가게 됐는데 나에게는 스승이 되시는 한경필 씨의 권유로 한지, 왕골, 우산, 부채 만드는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부채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때만 해도 한지 태극선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경험을 많이 얻었죠. 일제 말엽에는 태극선 제작이 금지됐는가 하면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들이 태극선을 모아 불태운다는 소식을 듣고 만들어둔 태극선을 황급히 감추고 피난을 떠나기도 했던 기억이 있어요. 일제시대 때 종이로 만들었는데 국화꽃도 못 놓았어요. 국화를 놓으면 잡아가서 징역을 살려버려. 그때는 인쇄를 못하니까 고무로 국화를 도장 파듯 파서 찍어 만들었는데 우리 꽃이기 때문에 못하게 하고 겨우 황새나 뱁새 같은 문양들을 속에다 파서 놓을 수 있었죠. 그러니 태극선인들 어떻게 만들 수 있었겠어요.

해방 후에는 일꾼들을 데리고 일을 했는데 없어서 못 팔정도로 판로가 좋았어요. 그런데 한국전쟁이 일어나 그해 여름에 팔려고 만들어 놓은 부채가 태극선 그림 때문에 해가 될까봐 집을 비워놓고 산으로 도망간 적이 있었어요. 한 20일 숨어 다니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그대로 있어 안심하고 만들었죠. 인민군들도 좋다고 부쳤어.”라고 회고하였다.

아중리의 석수리라는 동네에는 라태용 선생의 일가가 자리를 잡았는데,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부채를 만들었다고 한다. 1960년대 부채를 만들던 곳은 전라도 남원에서 외자루선과 쌍죽선, 태극선 등이 마을 단위로 생산되었고, 담양에서는 딱선이라 불리는 민선형태의 접부채가 생산되었다. 전주에서는 자재미골을 중심으로 30여 호가 합죽선 제작에 참여하였고 태극선은 가재미골에서 방춘근 선생이 전국 물량의 대부분을 작업했고, 모래내와 기자촌이라는 곳에서도 소량 생산되었다.


시대의 흐름을 부채에 얹다

그러나 이렇게 부채 만드는 일로 분주하던 때도 곧 지나가고 만다. 세상은 어린 방화선 명인이 순탄하게 부채 만드는 재미를 느끼도록 내버려두진 않았다. 선풍기가 나오고 얼마 후에는 에어컨까지 나와 기계가 만들어 낸 바람이 세상을 채웠다. 중국에서 만든 저가의 부채마저 들어와 시중에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부채는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부채만 만들어서는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 거짓말처럼 찾아와버린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쯤으로 기억해요. 1970년대였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집집마다 부채대신 선풍기를 들여다 놓기 시작하는 거에요. 부채 주문이 눈에 띄게 확 줄더군요. 거기다 새마을 운동이 끝나고 전주에 공단이 들어서면서 부채 만들던 사람들마저 거의 공단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그때부터 가세가 기울었죠.”

하지만, 고 방춘근 명인은 시대의 변화, 부채의 흥망성쇠와 상관없이 그저 묵묵히 부채를 만들었다. 방춘근 명인에게 부채는 인생 그 자체였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부채를 만들기 시작해, 한국전쟁 통에도 손을 놓지 않던 부채였다.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던 부채였다. 어렵다고 부채 만드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오남매 중에서도 방화선 명인만이 부채 만드는 일을 놓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했다. 방춘근 명인에게 부채가 인생 그 자체였다면, 어렸을 적부터 고사리 손으로 부채를 만들어 온 방화선 명인에게도 부채는 삶의 거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를 돕겠다는 생각이나 책임감에 앞서 부채 없는 인생을 생각할 수 없었다.

“제일 좋아하는 것, 그리고 제일 잘 하는 것이 부채였어요. 다른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재주도 없었죠. 오직 부채 만드는 생각만 했어요. 어떤 부채를 만들어볼까 하는 것만이 제 유일한 생각거리이자 고민거리였죠.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부채를 포기할 수 있겠어요.”

방화선 명인은 시대의 변화에 맞는 새로운 부채를 고민했다. 스물세 살이던 해, 처음으로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만의 부채를 만들었다. 태극부채 시계를 만들고 부채를 응용해 취침등을 꾸며보았다. 방춘근 명인은 크게 화냈다. 전통을 망쳐놓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방화선 명인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 그때 생각이 아버지와 달랐어요. 부채도 시대의 흐름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것들은 다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고 변화하는데, 부채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옛날에 만들던 부채와 현재 만드는 부채, 그리고 미래에 만들 부채가 똑같을 수는 없잖아요. 현대적으로 꾸며도 보고, 새로운 용도로도 시도해봐야죠.”

그때부터 방화선 명인은 거의 모든 종류의 단선을 가지고 실험을 거듭했다. 현대적인 그림과 글씨를 넣어보거나 민화를 그려보기도 했다. 해외 초대전 때 유럽 호텔에 걸려 있던 춘화에서 영감을 얻은 춘화 부채를 만들기도 하는 등 어디에서든 영감을 얻으면 바로바로 시도해보았다. 부챗살을 구부려 모양을 내는 곡두선도 현대적으로 용용했다. 곡두선은 대를 최대한 가늘게 쪼개야 원하는 모양이 섬세하게 나오는 부채, 방화선 명인은 이를 위해 연필심보다 더 가늘게 대를 쪼개어 다양한 모양의 부채 면을 만들어 선보이기도 했다.

부채는 기본적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지만, 실제로 부채의 용도는 훨씬 다양하다. 햇빛을 가리거나 남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가릴 때도 사용하며 모임이나 파티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소품으로도 쓰인다. 특히 합죽선의 경우 성리학을 치국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시대에는 선비들의 빼놓을 수 없는 애장품이었다. 눈에 띄는 전면적인 사치보다는 작은 부분을 꾸미는 은근한 사치를 즐겼던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갓끈, 안경, 광다회로 만든 허리띠인 술띠 등 부분적인 장신구를 사용하여 여유와 함께 멋을 누렸다. 당시 선비들이 부렸던 사치 중 하나가 바로 부채였다. 겨울에도 들고 다녀 중국인들이 신기하게 여길 정도로 부채는 조선 선비들이 사랑한 생활 속 멋 중 하나였다. 당시 부채는 여름한철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식히는 단순한 생활 도구가 아니었다. 유별한 사회에서 최소한의 가림으로 예의를 지키는 물건이었고, 유사시 적에게서 자신을 지키는 호신의 물건이었고, 자신의 내면을 표현한 그림이나 글로 사상을 표현하고 즐기는 선비의 평생지기였다. 이런 부채의 다양한 멋과 기능을 살려 방화선 명인이 만들어 내는 부채도 굉장히 다양하다. 방화선 명인이 전시 때문에 프랑스에 갔을 때, 호텔 욕실 입구 로비에 걸린 춘화를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든 춘화부채가 순식간에 팔렸을 정도로, 부채의 가능성과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50년 가까이 부채를 만들면서 지금껏 안 만들어본 부채가 없을 정도로 부채를 이용한 다양한 실험과 시도를 해왔지만, 얼마 전부터는 부채의 기본으로 돌아와 멋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부채에 다시 집중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방화선 명인은 옻칠에 흠뻑 빠져 있다. 칼에 긁히고 대살에 찔려 손이 성한 날이 없는 손에 검은 옻물까지 배었다. 부채에 옻을 칠하면 특유의 색감이 살아나며, 내구성도 좋아져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한지에 기름을 먹이는 유칠 작업을 아무리 정성껏 해도 물에 젖으면 결국 못쓰게 되어요. 그게 한지 부채의 한계지요. 하지만, 옻칠을 하면 이 한계를 넘어설 수 있어요. 다호리 고분군에서 발굴된 부채 자루가 긴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옻칠 덕분이에요.”

방화선 명인은 이미 내로라는 부채명인의 자리에 올랐지만, 새로운 부채, 더 좋은 부채를 위해서라면 옻칠을 배우고 생각하는 모양의 부채의 손잡이를 깎기 위해 직접 소목일을 배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부채에 대한 열정만큼은 한결 같다.


우리부채에 대한 자부심

방화선 명인은 최근 현대적인 감각에 맞는 새로운 부채를 만들면서도 전통이라는 맥은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전통 부채의 고졸한 맛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무 화려한 부채에는 고졸미가 없어,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만들지 않는다. 눈에 안차는 부채는 판매도, 선물로도 주지 않는다. 값싼 중국산 부채가 밀려와 한 달에 서너 개 밖에 못 팔 때에도, 누가 뭐래도 마음에 드는 부채만 만들었다. 전통방식 그대로 겨울이면 대숲에 들어가 부채에 쓸 대나무를 직접 베어오고, 일일이 부채 용도에 맞게 쪼개 놓는다. 풀도 우리 밀을 구해다가 직접 쑨다.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재료비도 못 건져 빚이 느는 형편이 되어도, 오직 제대로 된 부채 만드는 일에만 골몰했다.

다행히 몇 년 전부터 우리 부채에 대한 관심이 늘기 시작했다. 참살이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기계가 만들어 내는 바람에 대한 우려가 생기고, 전통에 관한 관심이 늘면서 부터다. 에어컨 대신 부채를 찾는 사람들이 생기고, 품격 있는 선물로 부채를 찾는 사람들도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외국인들에 대한 선물로 인기가 아주 높다. 다양한 부채를 시도하면서도, 결코 전통을 벗어나지 않았던 덕분이다.

“언젠가는 초대전에 참여하느라 유럽에 갔다가 다 떨어진 태극선을 아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모습을 봤어요. 외국 사람들은 우리 부채를 보고 정말 아름답다고 감탄해요. 그런데 언젠가는 미국 스페인 등으로 전시회를 갔는데, 같이 간 다른 공예작가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세일을 했어요. 하지만 저는 우리 전통문화가 헐값에 팔려나가는 것이 내키지 않아 끝내 세일을 한했죠. 결국 전통이 답인데, 그 가치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해서에요.”

이후, 방화선 명인의 작품이 세일을 할 때까지 기다리던 외국인들은 그가 한국으로 그냥 돌아와 버린 후에야 겨우 수소문해서 제값주고 부채를 사간 적도 많다.

그러나 부채를 만들어 가는 삶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금전적으로 넉넉하지 않아 본격적으로 부채를 배우려는 사람도 없고, 시작하더라도 중간에 그만둔 사람들이 허다했다. 하지만 지금은 방화선 명인의 딸이 대를 이어 부채를 그에게 부채를 배우고 있다.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인 방춘근 명인 옆에서 귀여움을 받으며 잔심부름을 하던 손녀딸이 자라 이제는 어엿하게 가업을 잇겠다고 나선 것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아카데미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그에게 부채를 배우는 제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 중에는 방화선 명인의 뒤를 이어 본격적으로 부채 장인으로 뛰어들겠다는 솜씨 좋은 제자들도 많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라, 방화선 명인은 그저 신바람이 난다.

부채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도 새로워지고 있다. 기계 바람과 값싼 중국산 부채에 밀려 한동안 밀려 있는 우리 부채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부쩍 늘면서 일할 맛도 늘었다. 그만큼 더 좋은 재료로 더 다양한 부채를 만들고 싶은 방화선 명인의 의지도 한층 탄력을 얻었다.

얼마 전부터 방화선 명인은 부채 만드는 작업 이외에도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일들로 가득하다. 초등학교 학생과 선생님,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전통 부채 만들기 체험 강연이 줄을 잇고 있다. 이런 전통문화와 관련된 체험학습은 방화선 명인으로부터 출발했다고 과언이 아니다. 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전통문화 관련 체험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다. 안산 단원미술제에 초대받은 방화선 명인은,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가지고 체험을 해보겠다고 했다. 시연과 함께 아이들이 직접 부채를 만들어 볼 수 있도록 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것이 퍼져 지금은 박물관이나 전시회 등에서 심심찮게 전통문화 관련 체험부스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몇 해 전만하더라도, 부채 체험수업을 신청했던 학교가 몇 군데 되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그 수가 급격히 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일고 있는 전통문화와 우리 부채에 대한 관심의 반영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이해도 빠르고, 창의력도 놀라워요. 파란색은 하늘, 빨간색은 땅, 노란색은 인간을 뜻한다는 태극선의 원리를 말해주면 다들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보곤 하죠. 그리곤 곧바로 태극의 삼색을 이용해서 제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부채를 만들어 내고는 해요.”

현재 방화선 명인은 한국소리문화의전당 국제회의장 1층에 작업실 겸 전시장을 갖고 활동하고 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방화선 명인의 작품은 물론이고 그가 작업하는 모습, 그리고 부채 만드는 체험도 손쉽게 즐길 수 있다. 부채 만드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자연스러운 방화선 명인은 그의 작업실이 있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쉼터 역할과 함께 체험 센터로 활성화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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