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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목장 소병진 2013-01-28 946
 
양반과 부호가 많았던 전주는 예부터 다른 지방보다 가구공예가 특별히 발달했다. 견고함은 물론이고 실용적이면서도 화려하고 기품있는 맞춤형의 그 작은 가구에 사람들은 ‘전주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최고의 대접을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전주장은 어느 날 갑자기 거짓말처럼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열네 살 때부터 목가구를 시작해 일찍이 ‘기술’ 하나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던 소병진 명인은 자칫 사라질 뻔 했던 전주장을 다시금 발굴하고 복원해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다. 인사동 골동품점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전주장은 온통 그를 사로잡았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전주장을 연구하기 시작한지 10여 년에 거쳐 소병진 명인은 버선장, 이층장, 머릿장 등 다양한 전주장을 복원했다. 2001년도부터는 전승공예대전에도 출품했다. 첫 해에는 장려상에 그쳤지만, 해가 바뀔 때마나 그 깊이를 인정받아, 2004년에는 결국 대통령상을 받았다.

소병진 명인은 새로운 꿈을 위해 여전히 청년처럼 뛰고 있다. 매일매일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후배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전주장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할 계획도 갖고 있다. 시대에 맞는 간결하고 편리한 전주장을 개발하여 더 이상 과거의 유물이 아닌 현대인들에게도 사랑받는 전주장을 만드는 것과 전주장 전문 박물관을 만들어 전주장을 계속 알리면서 누구든 전주장을 배울 수 있도록 공방을 마련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천년의 꽃’, 전주장을 되살려내다

양반과 부호가 많았던 전주는 예부터 다른 지방보다 가구공예가 특별히 발달했다. 견고함은 물론이고 실용적이면서도 화려하고 기품있는 맞춤형의 그 작은 가구에 사람들은 ‘전주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최고의 대접을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전주장은 어느 날 갑자기 거짓말처럼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열네 살 때부터 목가구를 시작해 일찍이 ‘기술’ 하나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던 소병진 명인은 자칫 사라질 뻔 했던 전주장을 다시금 발굴하고 복원해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다. 인사동 골동품점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전주장은 온통 그를 사로잡았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전주장 복원과 함께 소목장으로서의 영예는 거의 다 얻었지만, 아직 그의 욕심은 많다. 시대에 맞는 간결하고 편리한 전주장을 개발하여 더 이상 과거의 유물이 아닌 현대인들에게도 사랑받는 전주장을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천년의 꽃, 전주장

호남지방은 그 여느 지역보다 다양한 문화예술의 꽃을 피웠던 고장이다. 소목기술도 예외가 아니다. 전주와 나주, 화순지역의 목가구가 유명했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왕조의 본향이자 전라감영이 있었던 전주의 목가구는 특히 발달했다. 양반들이 많이 살았고, 주위에 넓은 평야가 있어 부호들이 많아, 다른 지방에 비해 가구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전주에서 제작된 목가구에는 특별히 ‘전주장’이라는 이름이 붙어 귀한 대접을 받았다. 전주장은 제작기법이 특수한 고급가구로 전주와 인근 완주에서 제작되었다. 그런데 나주의 소반과 화순의 목가구가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는 중에도 그 명맥을 유지한 반면, 전주장은 이미 100여 년 전 그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그 자취마저 완전하게 사라질 뻔했던 전주장을 되살린 이가 바로 긍재 소병진 명인이다.

전주장은 주로 오백년 이상 된 질 좋은 고사목의 무늬만을 골라 내, 외부 모두 완전 통판만 사용하는 고급가구였다. 특유의 기품있는 아름다움과 기능성으로 인해 사대부 양반가들의 애장품으로 사랑을 듬뿍 받았다. 전주장은 주로 맞춤형 가구로 제작되었다. 주문자의 기호에 따라 의복이나 책을 보관하는 책장 겸용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쓰임새 또한 다양했다. 이를테면 하나의 가구에 여러 가지 기능을 접목하여, 선조들의 공간 활용 지혜를 보여주는 가구였던 셈이다.

전주장은 일반적으로 다른 지역의 가구보다 크기가 작고, 장 안에 귀중한 문서들이나 패물 등을 갈무리 할 수 있는 비밀문갑이 달린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화려하면서도 기품있는 아름다움에 실용성까지 겸비한 이 작은 전주장을 사람들은 조선시대 후기 우리 전통가구의 결정판이라고 일컫는다.


목수의 피를 받고 태어나

긍재 소병진 명인은 1952년 완주군 용진면 용흥리 녹동부락에서 태어났다. 7남매 중 차남이었다. 그의 위에는 누나 두 명과 형 하나, 밑으로는 남동생 둘과 여동생 하나가 있었다. 그가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는 전주 전매국에 다니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한국담배인삼공사다. 하지만,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서 가사는 급격히 기울고, 당시 할아버지가 살던 그의 고향마을로 이사를 오게 된다. 그의 고향마을은 소씨 씨족마을이다. 조상대대로 3백년 넘게 가업을 이루고 살던 동네다.


“그때는 우리 집안이, 그 동네에 말하자면 목수들이 많이 살았어요. 우리 할아버지를 비롯해서 우리 대부님들 전부다 목수들이었어. 전부다 대목장, 소목장. 그러고 내가 어렸을 때, 팽이도 만들고 연도 만들고 썰매도 만들고, 그러면 유독 내가 만든 것이 뭐든 좋았어요. 연도 높이 날지, 팽이도 잘 돌지.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너는 목수 소질이 있다. 커서 목수를 해라”고 말씀하시고. 그 말이 씨가 되가지고 내가 목수가 된 것 같아요.”

소병진 명인은 목수 집안의 핏줄을 타고 태어나 늘 목수 일을 지켜보며 자라왔다. 자연스럽게 목수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가 살던 소씨 집성촌은 목수 마을로 유명했다. 그의 할아버지를 비롯해 문중어르신들 중에는 용진면을 대표하는 대목장이 있었는가 하면, 집안의 형뻘들은 소목일을 하고 있었다. 그 중 8촌 형이던 소병석 씨는 당시에도 전북 유일의 소목장인으로 유명했다. 이런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자란 소병진 명인은 소병석 씨의 권유로 자연스럽게 소목장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 이제 그의 나이 열다섯 되던 해였다. 그가 처음 들어간 곳이 전주중앙가구점이었다.

“그 당시만하더라도 내가 살던 고향에서 전주까지 20리 길이었죠. 지금이야 가깝지만, 그때는 다 걸어 다녔어요. 가끔 버스가 오면 타고 다니기도 했지만, 차비도 아깝고 해서 거의 걸어 다녔죠. 고생은 했지만, 형님 덕분이 첫 단추를 잘 꿴거에요. 최고 공장에 들어간거니까요. 1960년대 70년대 중앙가구점하면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던 공장이었어요.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기술이 좋았고, 일을 또 잘해서 배울게 많았습니다.”

지금이야 브랜드도 많고, 공장에서 찍어내듯 가구를 만들어 내지만, 당시만 해도 다 맞춤가구였다. 약혼식을 하고 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농을 맞추러 가는 것이었다. 그만큼 농은 최고 혼수였다. 농 값만 해도 엄청났다. 쌀 50가마니, 100가마니 값을 춰야 맞출 수 있었다. 그만큼 가구공장이나 그 안에서 일하는 소목장들이 잘 나가던 시절이었다. 전주중앙가구점만 해도 물량을 대기 위해 50명의 종업원을 데리고 밤낮 농을 짰다.

“직원 50명이라고 하면, 엄청 잘나가고 큰 공장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전주중앙가구점에 다닌다고 하면 누구나 욕심을 냈어요. 서울에 있는 공장을 가더라도 전주중앙가구점에 다녔다고 하면 별다른 말없이 바로 채용이 될 정도였습니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그 자체가 제일 큰 이력이 됐던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거기서 배워서 오늘날의 제가 된 거라고 할 수 있어요.”

기술에 대한 남다른 욕심

가구공장에 들어간 소병진 명인의 머릿속에는 빨리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빨리 기술자가 되어 돈을 벌어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주고 싶었다. 자신은 배우지 못했지만, 동생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실컷 배우게 해주고 싶었다. 공장에서는 같은 마을 선배가 그의 선생님이 되었다. 그의 8촌 형인 소병석 씨 아래에 있는 기술자 중 한명이었다. 공장은 목공부, 도장부, 자개부, 칠기부 이렇게 네 파트로 나눠져 있었다. 그가 처음 발을 디딘 곳은 목공부 소목반이었다.

“거기에 들어가서 보니까 도제식이에요. 제자들이 두 단계가 있어. 말하자면, 막 들어가면 첫 단계는 심부름하고 마당 쓸고 하는 거고, 그 윗 단계는 일을 좀 한단 말이야. 그 다음에는 몇 년 된 사람들. 거기에 내 3년 위 선배가 있었는데, 보니까 일을 아주 잘했어요. 내 속으로‘저 양반을 따라 잡아야겄다’마음을 먹었죠.”

목표가 정해진 다음부터는 퇴근도 하지 않았다. 공장에서 작업하고, 밥해먹고, 또 그곳에서 잠을 잤다. 출퇴근 시간마저 아까웠다. 작업을 하던 공장의 작업대에 아무렇게나 이불을 깔고 자고, 아교 끊이는 연탄에다 밥을 올려 해 먹었다. 그런 생활을 딱 2년 반, 그는 남들 10년, 15년 배워야 된다는 것을 그 사이에 모두 배워버렸다. 중앙가구점에서는 그런 그를 일러 신동이라고 했다.

어느 날은 김석환 중앙가구점 사장이 그를 보더니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너는 기술자를 해라” 단 한마디였다. 이 한마디로 그는 명실상부, 자타공인의‘기술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당시 공장 구조에 비추어 말이 안 되는 파격이었다. 공장에는 도급공이 있고, 월급공이 있었다. 월급공들은 매달 일정한 월급을 받는 기술자들이었다. 일을 많이 하나 적게하나 무조건 월급은 같았다. 도급공들은 달랐다. 일을 하는 대로 그만큼의 대가를 받아갔다. 농하나 만드는데 얼마씩 주는 식이었다. 그만큼 남다른 기술과 경력이 있어야 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니까, 도급공들은 정말 일을 열심히 했었죠. 일을 하는 만큼 돈을 버니까. 그때는 농 만드는 손이 계속 딸렸어요. 기계 없이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야 할 때라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딸렸던 거죠. 마침 당시는 우리나라가 새마을사업이네 뭐네 하면서 집들도 커지고 살기도 좋아지니까, 농에 대한 수요도 정말 많았던 때에요. 그때는 농 만드는 공장을 농방이라고 했는데, 농방쟁이라고 하면 서로 딸을 줄려고 했어요. 돈을 잘 버니까. 그때는 시대가 먹고 사는 것이 최고 급선무였고, 그러니까 농방쟁이한테 시집만 가면 잘 산다고 해서 인기가 아주 많았었던 거죠. 60년대, 70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호황을 누렸어요. 그래서 도급공이 되려면 정말 열심히 일하고 또 사장이 그걸 인정해 줘야 될 수 있었어요. ‘너는 지금까지 열심히 일했고, 기술도 좋으니까 이제부터 도급공을 해라’이래야만 될 수 있던거죠. 월급쟁이들보다 몇 배나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소병진 명인은 당시 전라북도에서 제일 큰 가구점일 뿐만 아니라 한강 이남에서도 제일 크고 유명한 공장이었던 전주중앙가구점에서 일하면서 정신력과 부지런함을 배웠다고 회상한다. 그를 2년 반 만에‘기술자’로 인정해준 김석환 사장에게 특히 배울 점이 많았다. 겨울에는 아침에 종업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먼저 와서 미리 불을 펴놓던 사장이었다. 공장안에 냉기 가득한 겨울 아침에는 일을 못했기 때문이다. 김석환 사장이 미리 불을 피워 공장을 따뜻하게 덥혀 놓고, 아교도 끓여 놓으면, 직원들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일감이 쌓여 있는 상황에서 사장은 작업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으니 좋았고, 직원들도 일을 많이 할 수 있어 좋았다.

그만큼 김석환 사장은 경영을 잘하는 사업가였다. 같은 디자인의 제품만 만들다 보면 상품성이 떨어진다며, 서울에서 유명한 가구 디자이너를 데려와 같이 일을 하기도 했고, 제품 품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꼼꼼했다. 뛰어난 장인이기도 해서 자신과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실력을 키우는데 많은 힘을 쏟기도 했다. 덕분에 함께 일했던 직원들치고 솜씨없는 사람이 없어, 지금도 다들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이런 김석환 사장에게 인정받았다는 것은 어린 소병진 명인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남들 막 시작할 때, 나는 기술자가 된거니까. 그 분이 어느 날은 ‘이걸로 작업해라’하면서 연장을 30만원어치 사주기도 했어요. 기술자로 인정받았다는 거잖아. 그때가 정말 최고 날아갈 듯 기분이 좋을 때였어요. 왜냐면 나를 기술자로 인정해줬다는 거고, 또 나를 제자로 생각했다는 거니까. 나는 어떻게 보면 기술자가 되어야겠다는 내 소원을 이룬 거잖아.”

그때가 그의 나이 고작 열일곱 열여덟 되던 때였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도급공까지 올라간 소병진 명인은 1974년 서울 유학을 결정하게 된다. 전라북도에서는 더 이상 배울 기술이 없다는 이유였다. 기회는 우연찮게 찾아왔다.

어느 날 서울에서 유춘봉 씨라는 유명한 기술자가 중앙가구점으로 내려왔다. 고향이 남원이었던 소목장으로, 소병진 명인은 지금도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할 만큼 각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이다. 서울에서도 열손가락으로 들어갈 정도로 정말 잘나가던 목수였다. 김석환 사장이 유춘봉 씨를 최고대우를 해주며 데려온 이유는 새로운 디자인 개발을 위해서였다. 당시 아무리 가구가 잘 나가던 때라 하더라도, 앞으로도 계속 팔기 위해서는 디자인을 계속 개발해야 한다고 김석환 사장은 생각했다. 그런데 전라북도에서는 마땅히 가구 디자인할 장인들이 없었고, 단순한 디자인의 가구들만이 계속 반복적으로 생산되고 있었다. 파격적인 대우에 특채로 채용된 유춘봉 씨는 제자 네 명과 함께 전주로 내려왔다. 서울에서 잘 나가던 유춘봉 씨에게도 소병진 명인의 손기술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양반이 도토리골에 살았는데, 어느 날은 나보고, 일이 끝난 후에 거기로 좀 오래. 갔더니 나를 보고선 하는 말이, ‘자네는 아직 한참 젊은데 일은 참 잘하네. 내가 보니까 자네는 전라북도에서 일은 제일 잘하는 거 같네. 내 자네한테 딱 한마디 해줄 수가 있네. 자네 돈이 필요한가, 아니면 기술을 배울려나.’이렇게 물어본단 말이야. ‘그래, 저는 기술을 더 배우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디 기술 배울 데가 있어야지요’ 하고 대답했더니, ‘그럼 내가 서울동일가구에 취직시켜줄라네. 대신 김석환 사장이 알면 큰일 날 테니, 비밀로 하세. 서울 동일가구 공장장이 내 후배니까 내가 추천서를 써주고 전화도 미리 해놓을 테니까, 그걸 가지고 올라가 보시게. 자네는 거기서 조금만 더 배워서 오면 큰 재목이 되겠네. 거기 가서 원목의 원리랑 디자인을 좀 배워서 오시게. 자네는 젊어서 전망이 아주 좋네.’그래. 그 말을 듣고 어찌나 고마울 수가 있어야지.”

때마침, 소병진 명인은 새로운 기술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때 동일가구에서 일해보라는 제의를 받은 것이다. 동일가구는 당시 청와대에 가구를 납품하고, 일본에 수출까지 하는 동양 최대의 가구공장이었다. 농방쟁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곳이었다.

소병진 명인은 내친김에 다음날 공장에 가자마자 김석환 사장을 찾아가 동일가구에 가서 3년만 기술을 더 배우고 오겠다고 말했다. 김석환 사장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동일가구에 들어갈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소병진 명인은 1971년 처음 전주에서 열린 기능올림픽 가구제작 부문에서 딴 은메달이 있어 가능할 것이라며 김석환 사장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기술은 소병진 명인의 모든 것

기술은 소병진 명인의 모든 것이다. 그리고 자신 또한 기술에 있어서만큼은 누구 못지않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기술에 대한 그의 집착이 단순한 돈벌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술을 통해 그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가늠해볼 수 있었고,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1971년 기능올림픽이 전주에서 처음 열렸다. 소병진 명인은 가구제작부문에 참가했다. 자신의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은메달을 받았다. 당시의 은메달은 소병진 명인에게는 지금도 억울한 일이었다. 전주공고에서 시험을 치렀고, 심사위원 등 대회와 관련된 대부분의 인물들이 모두 전주공고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금메달은 전주공고 조교가 차지했다.

기술에서만큼은 최고가 되지 못하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그였기에 상처가 컸다. 중학교 중퇴가 이유라는 생각에 비애도 느꼈다. 때문에 그는 지금도 각종 대회나 공모전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 그 누구보다 엄격하고 공정하게 한다.

그렇다하더라도 당시 참가자 스물네 명 중 2등이었고, 학교출신 빼고 사회인 가운데는 최고였다. 억울했지만, 자부심도 크게 느꼈다. 은메달을 목에 걸고 시가행진을 하던 날, 그는 더욱 더 이 길이 자신의 소명이라 자신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1년 뒤인 1991년, 당시 마흔 살이던 소병진 명인은 노동부가 실기경합을 벌여 인정하는 가구제작 명인 제1호로 선정되었다.

스무 살도 안돼서, 동일가구 일본 수출반에 들어가다

유춘봉 씨의 소개로 결국 소병진 명인은 서울에 있는 동일가구에서 일하게 된다. 그가 목숨처럼 아끼던 공구함과 제자를 함께 데리고 갔다. 대한민국 최고의 목수가 되자는 다짐과 함께였다. 과연 동일가구는 동양최대 공장이라는 타이틀에 걸 맞는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3만평 부지에 제재소가 두 군데나 있었고, 종업원 수는 5백 명에 달했다.

“저는 거기서 실은 제 인생이 바뀐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전라북도에서만 일하다가 거기 가니까 완전히 별천지에요. 완전히 귀신이 곡할 노릇이더라고.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싶을 정도였어요. 바로 여기다 싶었죠.”

당시 동일가구는 국내반과 수출반, 청와대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소병진 명인이 처음 들어간 곳은 국내반이었다. 아무리 추천서를 들고 왔다고는 하지만, 일단 나이가 너무 어려 그의 실력을 장담할 수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국내반 일이란 소병진 명인에게는 그저 시시한 일거리에 불과했다.

“그래 어느 날은 반장에게 말했어요. ‘반장님, 이런 일은 제 제자도 여기보다 일을 더 잘합니다. 저 이런 일 하려고 도급하던 걸 포기하고 여기 올라온 거 아닙니다. 정말 최고의 기술자들과 함께 일하고, 배우고 싶어서 왔습니다. 기능대회에서 메달까지 딴 사람입니다.’하고 화를 내버렸어요.”

이후 소병진 명인은 청와대 납품하는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매일 의자만 만들고 있었다. 목가구를 만들던 그에게 매일 의자만 만드는 일은 적성에도 맞지 않고, 기술을 배울 기회도 없었다. 다시 얘길 해, 마지막으로 간 곳이 일본수출반이었다.

“일본 수출반으로 가기 전에 가구를 보여주는데, ‘백골’이라고 하는 아직 칠하기 전 가구를 보여주는 거에요. 그런데 너무나 작품이 좋은거야. 거기서 실은 기가 팍 죽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여기 있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너무 작품이 좋으니까, 배우고 싶었던 거지.”

일본수출반에는 열 명의 기술자들이 있었다. 최고의 기술이 필요한 만큼, 모두 나이 지긋한 기술자들이었다. 일을 시작하자 작업대 하나와 기숙사를 내어 주었다. 전주에서 일할 때와는 일의 시스템도 많이 달랐다. 전주에서는 모든 작업이 다 소병진 명인의 머릿속에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들이 그의 손끝을 거쳐 작품으로 제작되었던 것이다. 동일공장에서는 도면이라는 것이 내려왔다. 만들어야 할 농의 구조뿐만 아니라, 작업시간까지 상세하게 지침이 내려져 있었다. 소병진 명인은 직감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첫 작업을 딱 하루 전에 끝냈다. 사람들이 모두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더욱 긴장했다. 첫 작품이 끝난 후 동일가구에 있는 사람들조차 모두 놀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어린 소병진 명인은 동일가구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작업지시는 계속 내려왔다. 소병진 명인은 계속 하루씩 일찍 끝내줬다. 사실 작업지시 시간을 조금 넘겨도 상관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끝내줬다. 마침 동일가구에 있던 사람들도 중앙가구 김석환 사장을 많이들 알고 있었고, 그곳에서 일했던 사람들도 많아 도움도 많이 받았다.

동일가구에서 일하는 동안 소병진 명인의 관심은 무엇보다 디자인에 있었다.

“거기서 도안공부를 했어요. 디자이너 중 양현석 씨라고 있었는데, 인천사람이었어요. 그 사람한테 저녁마다 술 사주고 찐 계란 사주고, 월급날 되면 밥 사주면서 디자인을 가르쳐달라고 해서 배운 거야. 옛날에는 주먹구구식으로 했는데, 도안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원목을 완전히 소화했어요. 거기는 전부 원목에 손으로만 작업을 해야 했거든요. 왜냐하면 일본사람들은 손맛이 안 나면 사가질 않기 때문이었죠.”

전주장과의 운명적 만남

그가 처음 전주장을 만난 것은 동일가구에서 일하던 어느 날이었다. 인사동에 동일가구 전시장이 있어 휴일이면 곧잘 인사동을 찾았는데, 어느 날 한 골동품 가게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특별한 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가 명인이 되었던 1992년 어느 날이었다. 느티나무로 만들었는데, 조그마한 것이 소병진 명인의 할머니가 쓰던 것과도 조금 달랐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전주장’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2천5백만 원짜리였다. 직원이 조선시대 때 전주에서만 나왔던 농이라고 설명했다. 순간 그의 귀가 번쩍했다. 그때 ‘저 전주장이 딱 내 것’이라 직감했다.

그동안 전주와 서울에서 매일같이 가구를 만들었지만, 남들이 만든 것이나 자신이 만든 것이나 똑같았다. 이제 ‘내 것’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때부터 전주장을 복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박물관이며, 인사동이며, 봉동, 완주, 전주를 다 수소문하면서 다녔다. 전주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어렵게 전주장을 찾으면, 무조건 치수부터 재고, 구조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다들 카메라로 찍지는 말라고 했다. 그의 머릿속에 하나하나 기억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개인집에 있다는 소문만 들어도 무조건 달렸다. 알고 보니 그의 집안에도 몇 개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보아오던 것이지만, 그때는 그 것이 전주장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었다. 전주장을 공부하면서, 어렸을 적 봤던 것이 전주장이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모두 가서 찾아보았다. 그리고 전주장이 사실은 120여 년 전 고향마을인 용진에서 제작되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전주장은 하나도 같은 크기 같은 모양이 없었다. 왜냐하면 집으로 목수를 불러 그 집의 방 크기와 쓰임새에 맞게 제작한 맞춤형 가구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에게 맞춘 인간적인 가구가 바로 전주장이었다.

결국 소병진 명인은 우리나라 전통목가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조선한식가구 전주장의 원형제작에 완전히 성공하고 만다. 전주장을 처음보고 그것에 완전히 매료되어 제작기법을 연구한지 10여년이 훌쩍 지난 후였다. 전주장을 복원하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제작기법이 문헌으로 남아있지 않아 처음부터 그가 직접 모든 것을 연구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전주장을 연구하기 시작한지 10여 년에 거쳐 소병진 명인은 버선장, 이층장, 머릿장 등 다양한 전주장을 복원했다. 2001년도부터는 전승공예대전에도 출품했다. 첫 해에는 장려상에 그쳤지만, 해가 바뀔 때마나 그 깊이를 인정받아, 2004년에는 버선장으로 결국 대통령상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전승공예대전이라고 하면, 제일 큰 대회에요. 아마추어는 못 내고 프로들만 내는 곳이에요. 거기에 전주장으로 내기 시작했죠. 전주장을 만들어도 나만 알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평가를 받아보자는 생각으로 낸 거였죠. 그런데, 심사위원들 조차도 전주장을 잘 모르더라고. 평생 목가구 일을 했던 나도 늦게 알았는데, 그분들이 아는 것이 이상한거지. 그래서 판넬에 전주장에 대한 설명을 다 써서 출품했어요. 전주장이 뭔지는 좀 알고 평가해 달라는 거지. 2004년도에 대통령상 받고 나서는 전주장이 많이 알려지게 되었죠. 이후로 저는 ‘먹감장 잘 만드는 사람, 전주장 잘 만드는 사람’이라고 알려지게 되었고. 이제 저도 조금 성공을 한 거죠. 꿈을 이룬 거지. 남들한테 인정받았으니까. 지금은 누가 뭐래도 소병진하면, 전주장이라고 하잖아요.”

그는 특히 ‘먹감장 잘 만드는 명인’이라는 별칭을 자랑스러워한다. 최소 2백년은 자란 먹감나무로만 만들 수 있는 ‘먹감장’은 나무결 사이로 번져 있는 검은 무늬가 마치 붓질을 해 놓은 듯 품격 있어 예로부터 선비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재료다.

“안방에서는 안주인들이 느티나무를 써서 그 무늬를 즐겼어요. 반면에 사랑방에 있는 선비들은 먹감무늬를 즐겼어요. 색깔은 물론이고 냄새까지 먹 냄새가 난다는 거였죠. 어떤 무늬들은 완전히 수묵화보다 더 수려하게 나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굉장히 사랑받았던 재료인데, 해방 후부터는 먹감나무를 사용한 가구를 볼 수가 없어요. 왜냐면 먹감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다루기가 굉장히 까다롭고 변형이 심하거든요. 근데 이걸 다루는 방법을 잃어버린 거에요. 특히 한옥은 숨을 쉬는 구조라 뒤틀림이 그리 크지 않았는데, 아파트는 완전히 밀폐되어 있으니까 가구의 뒤틀림이 예전보다 더 심해져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큰 고민이었죠.”

그는 이 문제점을 끌어안고 몇 년을 고민했다. 나무를 소금물에 담가도 보고, 쪄서 만들어보기도 했다. 결국 찾아낸 것이 적층기법이다. 적층기법은 그가 만드는 전주장의 가장 큰 제작비법이기도 하다. 적층기법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습도와 온도에 따라 조금씩 수축하고 팽창하면서 뒤틀리는 나무의 특성을 감안해, 나무와 나무사이에 전주한지를 넣어 붙이는 기법이다. 닥나무 종이가 습기와 건조의 격차를 조절해 준다는 점에 착한한 방법으로 특허까지 받았다. 이렇게 기술에 대한 남다른 집념과 원목에 대한 깊은 이해로 그가 재현해 낸 전주장은 원래의 것보다 더 견고하고 튼튼해졌다.

아름다운만큼 만들기 까다로운 전주장을, 그동안 쌓아온 기술을 남김없이 쏟아 부어 하나하나 손으로 만들어 낸 것. 이렇게 피땀으로 재현된 그의 전주장이 뛰어난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겸비한 명품이자 예술품이 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꿈을 꾸다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 전주장이 있었어요. 조선이 없어지면서부터 전주장이 없어져버린 거지. 다 일본식으로 변해버린 거에요. 재료는 원목 그대로지만 일본식으로 얇아져 버린 거죠. 우리 것은 투박하거든, 그런데 지금은 얇아요. 그러나 저는 지금도 전주장만큼은 원형 그대로를 고집하고 있어요. 그래야 보존이 되는 거 아니겠어요. 요즘 시대로 보자면, 투박하지만 그게 바로 진짜 한국식이라는 거지. 칠도 아무것도 없이 기름칠만합니다. 동백이나 오동기름을 끓여서 바르는 거죠. 광이 없이, 나무 색채를 살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완전히 자연이 순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전주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전주장에 대한 소병진 명인의 열정은 현재 둘째 아들이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본격적으로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가구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도 다녀왔다. 자신이 갖고 있는 전통에 새로운 현대를 접목시켜야 한다는 소병진 명인의 조언 때문이다.

이와 함께 소병진 명인은 새로운 꿈을 위해 여전히 청년처럼 뛰고 있다. 매일매일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우석대학교 등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그 자신 또한 공부를 중간에 그만둔 아쉬움에 지금도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이미 검정고시를 거쳐 한국통신대학까지 졸업했다. 공부를 계속하며 전주장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할 계획도 갖고 있다. 앞으로, 전주장 전문 박물관을 만들어 전주장을 계속 알리면서 누구든 전주장을 배울 수 있도록 공방을 마련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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